아리스토텔레스의 사후, 그의 철학은 후계자들과 다양한 철학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재해석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철학과 논리학을 중심으로 한 실증적 사유는 점차 신학적·형이상학적 성격을 띠게 됩니다.
특히 헬레니즘 시대 이후, 로마 제국기, 중세 이슬람과 라틴 세계에 이르기까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신의 존재, 영혼, 목적론과 같은 종교적·신학적 문제를 설명하는 주요 도구로 채택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어떻게 신학화되었는지를 그 배경, 과정, 대표 학파 및 사상가들을 중심으로 탐구하며, 철학과 종교의 경계가 어떻게 융합되었는지를 살펴봅니다.
페리파토스 학파의 내적 전환: 순수 이론에서 종합적 형이상학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그의 직접 제자인 테오프라스토스와 그 뒤를 이은 스트라톤 등은 자연철학과 생물학, 윤리학을 발전시켰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페리파토스 학파의 관심은 점차 ‘존재의 본질’과 ‘신의 역할’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이동했습니다.
특히 고전기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 접어들면서, 철학은 점차 학문적 탐구를 넘어서 개인 구원의 도구로 변화해 갔고, 이에 따라 신적 원인과 목적론적 해석이 강조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 개념은 초기에는 자연 현상의 궁극 원인으로 해석되었지만, 점차 일종의 신학적 절대자로 읽히며, 철학과 종교의 중간 지대를 형성하게 됩니다.
중기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형이상학의 종교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스토아주의, 신플라톤주의와 접촉하면서 더욱 종합적인 형이상학 체계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는 존재론적 사유가 절대적인 ‘일자’ 혹은 ‘신적 원리’로 환원되며,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형이상학은 신적 존재의 속성을 정의하는 도구로 활용됩니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플라톤적 형이상학과 결합하여 ‘신에 이르는 합리적 길’로 삼았고, 이 과정에서 철학은 명상과 계시를 통해 신적 진리에 접근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분석 도구에서 경전적 권위로 변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슬람 철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신학화
8세기부터 12세기까지 이어진 이슬람 황금기 동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은 아랍어로 번역되어 이슬람 철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알파라비, 아비센나(이븐 시나),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 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이슬람 신학과 융합된 철학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예를 들어, 아비센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을 ‘필연적 존재’ 개념과 연결지어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 했으며, 신의 속성과 창조 개념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습니다.
이슬람 철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지 학문적 스승이 아니라 신학적 진리를 담은 권위자로 간주되었고, 그의 철학은 계시적 종교의 이성적 정당화 수단으로 변모했습니다.
중세 스콜라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적 체계화
라틴 서유럽에서는 12세기 이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되면서, 그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스콜라철학자들에 의해 신학 체계의 핵심 기초로 자리 잡게 됩니다. 특히 『형이상학』, 『자연학』, 『영혼에 관하여』 등의 저작은 신 존재 증명, 인간 영혼의 불멸성, 목적론적 세계 해석 등에 활용되며, 기독교 교리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통합이 시도됩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 중심주의를 계시 신앙과 조화시키며, “은총은 이성을 완성한다”는 유명한 표현을 통해 철학과 신학의 일치를 선언합니다.
이 시기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가 아니라 사실상 ‘신학자’로 재해석된 셈입니다.
신학화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영향과 문제점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신학화는 철학과 종교의 융합이라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철학의 독립성을 희생시켰다는 비판도 함께 받습니다. 논리와 분석을 강조했던 원래의 아리스토텔레스 정신은 종종 특정 교리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고, 이는 철학이 비판적 탐구보다는 교리적 해석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또한 철학이 종교적 목적에 종속되면서, 다양한 철학적 가능성과 해석의 자유가 제한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단순한 이론 체계를 넘어 인간 존재와 우주의 궁극적 의미를 탐색하는 도구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철학의 역할을 확장시켰다는 평가도 가능합니다.
철학과 신앙의 중간 지대: 현대적 시사점
오늘날에도 철학과 종교의 관계는 여전히 긴밀하며 복잡합니다. 과학과 이성이 주도하는 현대사회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묻습니다. 이럴 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신학화 과정은 철학이 어떻게 인간의 심오한 질문에 접근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현대 학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다시 순수 이론으로 복원하려는 시도도 있지만, 과거 신학화의 역사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철학은 독립성과 동시에 해석의 유연성을 갖추어야 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철학 전통은 이 두 경계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왔습니다.
신학화된 철학은 철학의 변질이 아닌, 새로운 진입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유산입니다.